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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자료

21. 한국도자기의 흐름 / 나선화/ 재단법인 세계도자기엑스포

21. 한국도자기의 흐름 / 나선화/ 재단법인 세계도자기엑스포

 

분청사기의 시대적 배경에관한 내용

14세기 후반, 고려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던 원나라기 쇠퇴하면서 고려의 왕실과 원의 왕실, 그리고 그 주변의 고위관리에게 제공되었던 정교하고 화려했던 유천리 청자도 그 수요처를 잃고 막을 내리게 되고 고려 왕실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개혁정치로 요구하는 지방관의 세력이 강해짐으로 인해 왕권이 약화되고 이에 따라 고려 문화의 상징이던 고려청자도 중앙관리 체제의 강진, 부안과 같은 전문 생산 집단에 의한 생산체계가 무너지고 소규모 수공업 체계의 가마운영으로 바뀌면서 많은 인력과 공정을 필요로 하는 상감청자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중국으로부터 주자학을 받아들인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지방 세력에 의해 고려의 중앙권력이 분산되면서 14세기 후반 청자는 실용적이고 생산이 용이한 소규모의 생산체계로 전환된다. 14세기 후반에는 실용적이고 소박한 고려청자가 생산되다가 근검한 생활을 지향하는 새로운 사상을 지닌 유학자들의 요구에 따라 금속기나 청자보다 그 생산비가 저렴한 분청자가 새로운 국가의 탄생과 함께 쓰이게 된다.

  점차 지방품관의 세력이 커지고 그들을 중심으로 지방에 안착한 주자학자들의 수요에 따라 실용적인 도자기의 지방생산이 증가되면서 중앙관청에서 필요한 자기도 지방가마에서 공급받는 생산구조를 이루고 이와 같은 수요 공급 체계는 14세기 후반부터 새로운 유교이념으로 건국된 조선시대에도 지속되어 조선의 중앙관요가 경기도 광주군에 설치되는 15세기 후반까지 지속된다. 전라도 부안 우동리, 충남 보령 용수리, 전남 곡성 구성리, 강원도 강릉 보광리 등지의 대규모 가마터가 이 시대의 것이다.

이때의 생산품은 균제성을 강요하는 왕실의 청자와는 달리 도공의 자유로운 손길과 숨길이 내재되어 새 나라의 힘을 표현하듯이 형태나 문양이 자유분방하고, 같은 상감기법이라 하여도 조각 칼질이 기운차며 거침이 없다. 그리고 흑백의 상감이 백 상감으로, 정교한 선 상감은 면 상감으로 변화되어 간다. 또 도장으로 무늬를 찍어서 반복시켜 백토를 감입하는 상감청자의 변화 양상인 인화문기법이 새롭게 개발되면서 고급도자기로 널리 쓰이기 시작한다.

 14세기 말에 나타난 이와 같은 도자의 특성은 한국 도자사에서 가장 한국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는 조선 전기 분청사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고려말 신진 지식인들은 결국 새로운 사조인 유학이념으로 새로운 나라인 조선을 건국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새로운 사상으로 새로운 도자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14세기 후반 고려의 지방 가마에서는 조선시대를 맞으면서 각 지방별로 새로운 자기인 분청의 생산이 활발히 이루어진다.


조선시대 분청자의 종류에는 그 장식기법에 따라 공납용 자기로 널리 쓰인 인화분청과 함께 상감청자의 기법이 계승된 상감분청, 백토를 분장한 후 선각으로 무늬를 새기는 조화분청, 역상감의 효과를 확대시킨 박지분청, 백토분장 위에 갈색의 그림이 선명한 철화분청 백토물에 그릇을 담가 낸 백토분장 분청 등 여러 가지가 있어서 분청자의 종류는 그 시문기법에 따라 6~7가지로 분류된다.

 이와 같은 분청사기의 장식기법은 중국 황하 북쪽에 있는 자주요의 12세기~14세기 도자기에서도 이미 있어왔던 장식기법이다. 그러나 이들 기법을 수용하여 제작한 조선시대 분청자들에서는 중국 자주요 도자기와 같이 자유 분망하고 활달한 기운이 가득하나, 한편으로는 자주요에서 볼 수 없는 겸허하게 자신을 꾸미지 않는 소박함이 있고 소박함 속에서도 멋을 찾고자 하는 아취가 있다.

 여러 가지 분청자에서 보이는 공통적인 특징은 모두가 시원하고 기운찬 문양으로 장식되었다는 것인데 이는 현대 서양미술이 추구하는 단순하고 간결한 구성으로 강한 개성을 표출하는 표현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이 분청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장식문양은 그 디자인에서 규격의 제한과 규제가 없었던 듯이 자유분방하고 연판, 당초문, 물고기 등의 사실적인 문양도 단순하게 도안화되어 현대미술과 상통하는 현대적 미감과 예술성이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제작공정에 있어서는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유색점토를 사용하여 백토분장하고 투명한 유약을 발라 소성하였기에 고려청자보다 그 생산가가 낮은 경제적인 도자기를 만들 수 있었다. 즉 제작이 까다롭지 않은 중국 북방의 자주요 계통의 자기를 선택하여 조선의 근검, 청빈한 생활철학을 반영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로 한국의 도자 기술사에 있어서 도기와 자기의 결합체와도 같은 새로운 자기인 분청자를 개발하게 되었으며 차가운 느낌의 청자와는 다른 따스한 사람의 손길이 느껴지는 자기를 탄생시키게 되었다.

 도기와 자기의 요소가 한데 어우러진 분청자의 성격은 분청자 형태에서도 드러난다. 형태에 있어서도 도기로 만들어지던 도기 항아리, 병, 장군, 편호가 분청자로 만들어졌으며 또한 시유도기라 할 수 있는 녹갈유 도기의 병, 호의 형태가 계승되어 청자나 백자에서 볼 수 없는 죄우대칭이 완벽하지 않은 형태로 손길이 닿는 대로 만들어진 듯 한 새로운 항아리를 탄생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접이나 접시에서는 중국 원나라 말기 명나라 초기의 경덕진 추부 백자대첩 형태와 같이 입술이 밖으로 꺽인 형태를 만들기도 하였는데 이를 보면 식기류에 있어서는 그 당시 아시아 최고의 자기인 중국의 경덕진 백자와의 교류가 이어지고 있었던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독특한 개성을 지닌 분청사기의 개발은 수요의 확대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생산이 증가되면서 새로운 왕국을 연 조선시대에서는 일상용기, 제래용기, 의식용기를 분청사기가 대신하게 되었다.

 즉 고려시대의 불교의식을 위한 의식 용기와 왕실과 귀족의 기호품으로 청자가 많이 쓰였다면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제례용기로 분청자가 쓰였으며 값싸고 제작이 용이하였기에 분청자는 일상 생활용기로 그 쓰임이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분청사기의 발전으로 한국에서도 비로소 도자기가 일상 생활용기로 널리 쓰이기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제작소도 지방 곳곳에 분포되어 있는 만큼 전국 각지에서 분청이 대량 생산되었다. 15~16세기 분청자의 생산흔적은 경기도 광주, 남양주, 과천 등 도성의 외곽과 충청남도 보령, 공주, 고흥, 무안, 전라북도 고창, 부안 등지에서 당시 대량 생산 되었던 그 역사의 흔적을 지금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중앙으로 공급되었던 고급 도자기인 인화분청사기와 같이 가마에서 소성된 일상용기들은 각 지방 장인의 솜씨와 습관에 따라 조금씩 다른 형태를 지니게 된다. 이 가운데 보령 용수리 제품에는 사발의 굽 밖으로 태토빚음을 붙인 것이 있다. 이와 같은 방법은 일본 17세기 가라츠에 나타나는 방법이어서 한국 서해안과 일본 큐슈의 기술교류를 집작케 한다.

 1392년에 건국된 조선왕조는 불교국가로 화려하고 정교한 문화유산을 남겼던 고려와는 달리 충, 의, 인을 건국이념으로 한 유교국가로서 단아하고 담백한 고유문화를 이루어간다.

 새로운 왕국의 지배계층인 성리학자들은 사사로운 개인의 이익보다 명분이 있는 공적인 일에 앞장서며 자신을 다스리는 일에 엄격하고 사치한 것을 배격하고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신조로 하며 가례를 중요시 하였다. 따라서 생활용기인 도자기도 표면장식이 다양한 상감청자, 분청사기보다 백옥같이 깨끗한 순백의 백자를 선호하였으며 18세기 후반 부터는 일반시민에게도 백자가 생활용기로 정착하게 된다.

 모든 제도를 재정비하여 중앙집권화하는 15세기의 조선왕조는 왕실과 지배계층에서 필요로하는 백자를 국가가 직접 생산하기위하여 1470년 경에 국가에서 직접 관리 운영하는 중앙관요를 설치한다. 왕실과 관청에서 필요한 백자생산을 전담하는 중앙관요는 1470년경에 경기도 광주군에 설치되어 1883년까지 조선왕조의 역사와 함께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