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받을 용기
저자: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옮김: 전경아
심리학 3대 거장 '아들러'의 진짜 내 인생을 살게 하는 용기의 심리학 책
알프레트 아들러(독일어: Alfred Adler, 1870년 2월 7일~1937년 5월 28일)는 오스트리아의 의사, 심리치료사이다. 빈에서 태어난 유대계 오스트리아인으로 개인심리학의 창시자이다.
《미움받을 용기》는 아들러의 사상을 '청년과 철학자의 대화'라는 형식으로 엮은 책이다. '어떻게 행복한 인생을 살 것인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에 아들러 심리학은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다. 아들러의 목적론을 책에 등장하는 젊은이의 비판적 질문을 통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아들러 철학을 설파하려는 철학자와, 이에 대해 의문을 계속적으로 제기하는 도서관 사서로 일하고 있는 청년의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물론 결론적으로는 청년이 철학자의 주장을 수긍하고, 스스로의 사고를 변화시킬 것을 선언하는 것으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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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는 '인간은 변할 수 있다, 세계는 단순하다,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와 같은 언뜻 이상론으로 들리는 주장을 한다. 이에 대해 청년은 반발심을 느끼고 반박을 하려고 한다. 둘은 본격적인 문답을 시작하기 전에 '세계는 단순하고 인생 역시 단순하다'는 명제부터 우선 이야기를 나눈다.
청년: 아이의 눈으로 보면 세계가 단순할 수 있지만, 어른이 되면 본성이 드러난다. '너는 그정도 밖에 안되는 인간'이라고 매도하고 온갖 차별과 빈부격차가 넘치는 세상을 단순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철학자: 세계가 혼돈으로 가득 차 보이는 건, '세계'가 복잡해서가 아니라 '개인'이 세계를 복잡하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주관적인 세계에 살고 있고, 그 때 받는 주관은 개인에게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된다. 그렇기에 개인이 변한다면 세계도 단순하게 바뀐다. 그리고 그러한 건 바로 용기가 결정한다.
첫 번째 밤 - 트라우마를 부정하라
◆: 알려지지 않은 심리학 제3의 거장. 알프레트 아들러
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신과 의사. 프로이트, 융과 나란히 심리학의 3대 거장으로 언급된다. "아들러는 평생을 바쳐 인간과 그 잠재 능력을 연구한 심리학자" 아들러 심리학은 '개인심리학'이라 하며, 개인심리학에서 인간을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전체'로 보고 각자의 개인은 독립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다뤄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들러는 저서를 남기지 않고 카페에서 사람들과 대화하거나 작은 토론모임에서 의견을 나눴다. 이는 대화를 통해 스스로 깨달음을 얻기를 바랐던 소크라테스와 비슷한 것이다.
◆: 인간이 변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과거의 원인에 주목해서 상황을 설명하려 든다면, 모든 이야기는 저절로 '결정론'에 도달하게 된다. 과거는 전혀 관계가 없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과거의 '원인'이 아니라 현재의 '목적‘을 본다.
◆: 트라우마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괴로운 것은 과거 때문이니 당신에게는 잘못이 없다"라고 위로하는 드라마틱한 전개의 트라우마 이론은 '원인론'의 전형이다. 하지만 어떠한 경험도 성공의 원인이나 실패의 원인이 될 수 없다. 단지 우리가 과거의 경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지금 우리의 삶이 결정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는 존재이고 어떠한 목적'을 따라 살고 있다. 이것이 '목적론'이다.
◆: 인간은 분노를 지어낸다.
분노란 언제든 넣었다 빼서 쓸 수 있는 '도구'이다. 자기의 주장을 밀어붙이기 위해 분노라는 감정을 이용하는 것이다. 즉, 분노는 어쩔 수 없는 감정이 아니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예를 들면 산 지 얼마 안 된 새 옷에 커피를 쏟은 웨이터에게 큰 소리로 화를 냈다. '화가 나서 큰소리를 낸 것'일까, 그저 '큰 소리를 내기 위해 화를 낸 것'일까. 정답은 후자다. 말로 차근차근 설명하는 것이 귀찮아서 저항하지도 않는 상대를 더 값싼 수단으로 굴복시키려고 한 것이다.
◆: 과거에 지배받지 않는 삶
누구나 감정은 있다. 하지만 인간이 감정에 저항할 수 없는 존재는 아니다. 인간은 감정에도, 그리고 과거에도 지배받지 않는다. 문제는 '무엇이 있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해석하느냐'이다. 따라서 인간은 변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린 시절 부모가 이혼했다'는 사실은 객관적인 사실이지만 그것을 느끼는 온도는 '지금의 주관적인 사실’이다,
◆: 소크라테스, 그리고 아들러
소크라테스 왈 : 누구하나 악을 원하는 자는 없다. 현재 불행하다고 느끼는데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면, 현재의 "불행한 상태" 를 자신에게 "선" 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런 것 들의 저반을 생활양식(Life style)이라고 한다.
"인간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변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변하지 않겠다 결심했기 때문이다. 변하는 것이 두려워 변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용기"가 필요하다. 아들러 심리학은 용기의 심리학이다. 행복을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받는 것이다. 모두에게 인정받고, 미움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부자유스러운 동시에 불가능하다. 자유에는 대가가 따르고, 그것은 미움 사기이다.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 말라. 타인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은 욕망을 "경향성" 이라고 한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이다. 그러나 우리는 욕구에 대응할 수 있는 존재이다. 미움받지 않기 위해 그들의 기대를 맞추는 삶을 살면 안 된다. 미움받을 용기가 없으면 타인의 삶을 살기 쉽다.
소속감은 가만히 있어도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공헌해야 얻을 수 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믿는 최선의 길을 선택하는 것" 그 뿐이다.타인의 평가는 무시하자. 평가는 타인의 과제이다.
◆: 당신은 '이대로' 좋습니까
타인과의 삶을 비교하는 것은 '무엇이 주어졌는가'에 주목하는 것이다.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주목해야 한다
◆: 나의 불행은 스스로 '선택'한 것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스스로 '불행한 상태'를 택한 것이다. 불행한 운명으로 태어났거나, 불행한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 아니라 '불행한 상태'를 스스로에게 '선'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인간은 끊임없이 '변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개인이 열 살 전후에 '생활양식'을 스스로 선택한다고 본다. 그리고 다시 선택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새로운 생활양식을 선택하면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불안감에 이런저런 불만이 있더라도 '이대로의 나'로 살아가게 된다. 생활양식을 바꾸려면 큰 '행복해질 용기'가 필요하다
◆: 나의 인생은 '지금, 여기'에서 결정된다
내가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생활양식을 바꾸려면 지금의 생활양식을 버리겠다고 결심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인생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앞으로의 인생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다.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지금, 여기'를 사는 당신이다.
청년: 앞으로의 주장은 어떤 학문에서 기인하는가?
철학자: 철학자 본인은 그리스 철학 전문가이지만, 앞으로의 주장은 '아들러 심리학'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이 둘은 사실 뿌리가 같다. 또한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과는 좀 다른 '개인심리학'의 이론을 띈다. 프로이트보다는 덜 유명해도, 아들러의 사상은 사람들의 상식이나 성공 조언으로 자리잡은 상태다.
청년: 인간은 변하고 싶어하지만, 변할 수 없는 존재이다. 친구 한 명이 방 안에서 틀어박혀 있다고 치자. 그 친구는 바깥으로 나오고 싶어함에도 밖으로 나오려면 몸에 이상 증상이 생겨 나오지 못한다. 그런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걸 어떻게 바꿀 것인가?
철학자: '과거'의 사건이 인간의 '현재'를 규정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은 가족이 학대를 해도 방 안에 틀어박혀 지내지 않을 수도 있는 법이니까. 친구는 '불안해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원인론)이 아니다. 친구는 밖으로 나오지 못하니까 불안한 감정을 지어내고 있으며, 이는 아들러 심리학에서 '목적론'으로 불리고 있다.
청년: 원인론과 목적론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철학자: 청년이 감기에 걸렸다고 가정하자. 청년이 의사의 진료를 받는다면, '옷을 어제 얇게 입어서 감기에 걸렸습니다'로서 진단이 끝나면 어떻게 느낄까? 말도 안 됨을 느끼고 의사에게 약이든 주사든 처방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원인론'에 입각한다면, 정신과 의사는 '과거에 트라우마가 있어서 지금 힘든거다', '너에게는 잘못이 없다' 이런 소리만 하게 된다. 하지만 '목적론'에 입각한다면, 애초에 트라우마라는 건 없다. 우리는 과거의 트라우마가 아니라 지금 내가 경험한 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가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 뿐이다.
청년: 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누가 커피를 쏟았다고 치자. 그래서 갑작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는데, 여기에도 '목적'이 개입할 여지가 있는가? 누가 봐도 커피를 쏟아서 화를 내는, '원인'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닌가?
철학자: 오히려 정반대다. 청년은 '큰소리를 내기 위해 화를 낸 것'이다. 말로 차근차근 할 수 있었음에도, 그런 과정이 귀찮아서 분노라는 감정을 동원한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엄마와 딸이 큰소리로 싸우고 있는데 갑자기 딸의 담임선생에게 전화가 왔다고 치자. 그러면 십중팔구 엄마는 분노를 확 가라앉히고 선생님과 조곤히 대화한다. 이러한 예시는 분노라는 게 언제든 넣었다 빼서 쓸 수 있는 '도구'라는 걸 의미한다.
청년: 감정을 도구에 불과하다고 여기면, 그건 감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철학자: 감정에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감정에 저항할 수 없는 존재다'라는 의견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과거에 저항할 수 없는 존재다'라는 의견 또한 받아들일 수 없다.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이유로 과거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면, 결국 세계에 절망하는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는 안 되고, 어디까지나 인간은 변할 수 있다는 전제를 갖고 있어야 한다.
청년: 그럼 비뚤어진 사람도 마음만 먹으면 밝고 사교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철학자: 처음부터 그렇게 될 수는 없다. 그럴려면 진정으로 아들러의 심리학을 이해하는 자세가 우선되어야 한다. 남이 던져준 답은 원인은 무시하고 증상만 처방하는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 아들러는 정보를 남에게 알리는 저술활동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무작정 답을 수용하는 게 아닌, 대화를 통해 답을 찾는 과정이 중요하다.
청년: 사람은 각각의 성격과 가정환경을 타고 태어난다. 그럼에도 '나에게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는가'를 주목하는 것은 현실을 외면한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철학자: 탁상공론은 오히려 그런 성격과 가정환경 위주로 생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것에 집착한다고 현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불행이 존재하는 경우는 없다. 사람이 불행함을 느낀 건 본인이 스스로 '불행한 상태'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불행한 상태를 스스로에게 '선(착할 선)'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청년: 그렇다면 꼬인 성격도 타고난 게 아니라 본인이 선택했다는 건가?
철학자: 애초에 성격이 아니라 생활양식의 관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비관적인 성격'을 가진 게 아니라 '비관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생활양식을 10살 전후에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 성격이나 세계관이나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세계관으로 본다면 이것은 다시 선택하는 것도 가능하다. 다른 사람의 환경을 부러워하는 것에 끝나서는 안되고, 스스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다른 관점으로 봐야 한다.
청년: 그렇게 이야기한다고 한들, 생활양식 또한 당장 그 자리에서 바꿀 수 없는 것 아닌가?
철학자: 그렇지 않다. 인간은 언제든, 어떤 환경에 있든 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건 그 사람이 지금까지의 생활양식이 익숙해져 바뀌지 않겠다고 (무의식적으로라도) 끊임없이 결심해왔기 때문이다. 새로운 생활양식이 미치는 영향을 알 수 없으니 그에 대한 내적인 불안감을 느끼는 것. 그렇기 때문에 변하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아들러의 심리학은 용기의 심리학이다.
청년: 그런 생활양식을 바꿀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철학자: 간단하다. 바로 지금의 생활양식을 버리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만약 밝아지고 싶다면, 밝아지겠다는 결심과 하나씩 바꿔나가면 된다. 그러다 좌절을 겪게 되면 좀 어떤가? 그걸 계기로 더 성장하거나, 다른 방법을 모색할 수도 있는 거다. 중요한 건 시도를 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청년: 철학자의 주장은 지나치게 잔인하다. 트라우마는 존재하지 않아, 환경도 관계없어, 모든 게 자업자득이고 불행한 것도 다 네 탓이라고 뒤집어씌우는 게 아닌가?
철학자: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아들러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지금까지의 인생에 무슨 일이 있었든지 앞으로의 인생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다는 것이다. 인생을 결정하는 건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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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밤 -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 왜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가
자신의 단점을 찾아내서 스스로를 미워하고 인간관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 것은 "나는 이런 단점이 있어서 거절당했다" 또는 "이런 단점만 없으면 나도 사랑받을 수 있다"고 변명하며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함이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지 않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고민을 없애려면 우주 공간에서 그저 홀로 살아가는 수 밖에 없다.
◆: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고민'이다
개인에 국한되는 고민, 이를테면 내면의 고민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고민이든 거기에는 반드시 타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 열등감은 주관적인 감정이다
열등감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타인과의 비교(인간관계)를 통해 만들어낸 주관적인 해석이자 감정'이다. 우리는 객관적 사실을 움직이지 못하지만 주관적 해석은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다.
◆: 변명으로서의 열등 콤플렉스
인간은 무기력한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났고 무기력한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보편적인 욕구를 갖고 있는데 아들러는 이를 '우월성 추구'라고 한다. 그래서 어떠한 이상과 목표를 내걸고 그것을 향해 전진하지만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면 내가 뭔가 모자란다고 느끼게 된다. 이것이 열등감이며 우월성 추구와 함께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또한 열등감은 모두 병이 아니라 건강하고 정상적인 노력과 성장을 위한 자극이다. 그러나 생활양식을 바꿀 '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열등감을 자극이 아닌 변명거리로 삼는다. 그러한 시작한 상태를 '열등 콤플렉스'라고 부른다. 콤플렉스란 복잡하게 얽힌 도착적인 심리상태를 표현하는 용어이다.
"나는 학력이 낮다. 그러니 남보다 몇 배 노력하자"라고 결심한다면 열등감이고, "나는 학력이 낮아서 성공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면 열등 콤플렉스다. 후자는 학력이 낮아서 성공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성공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학력이 낮은 것과 성공은 어떤 인과관계도 없다. 지금 누리고 있는 놀거나 취미를 즐기고 있는 시간을 희생해서까지 변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 자랑하는 사람은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
열등감을 오랫동안 참아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생활양식을 바꿀 '용기'가 없는 사람은 열등 콤플렉스에 빠지는데 이는 또 다른 특수한 심리 상태인 '우월 콤플렉스'로 발전하기도 한다. '못난 나'를 받아들일 수 없어 더 값싼 수단으로 보상하려는 것이다. 그 밑바닥에는 강렬한 열등감이 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주위에 누구 한 사람 '이런 나'를 인정해주지 않을까 봐 겁이 나는 것이다. 권위의 힘을 빌려서 자신을 포장하는 사람은 결국 다른 사람의 가치관에 맞춰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게 된다. 정말로 자신 있는 사람은 자랑하지 않는다. 반대로 '불행 자랑' 유형도 있다. 열등감 자체를 첨예화 시켜 특이한 우월감에 빠지는 패턴이다. 불행한 것을 '특별'하다고 여기고 불행함을 무기로 남보다 위에 서려 하는 것이다. 연약함은 매우 강한 권력을 지닌다. 갓난아기는 어른들을 지배하지만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불행을 '특별'하기 위한 무기로 휘두르는 한 그 사람은 영원히 불행을 필요로 할 수 밖에 없다.
◆: 인생은 타인과의 경쟁이 아니다
우월성은 다른 사람을 넘어트려서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경쟁의사가 아니다. 인간에게는 차이만 있을 뿐 상하 구별이 없다. 아들러가 말하는 우월성은 자신의 발을 한 발 앞으로 내딛으려는 의지이다. 따라서 건전한 열등감도 타인과 비교해서 생기는 것의 아니라 '이상적인 나'와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다. 내가 나로서 살려고 할 때 경쟁은 필히 방해가 된다.
◆: 내 얼굴을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은 나뿐이다
경쟁'이 있는 한 인간은 영영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경쟁의 끝에는 승자와 패자만이 남기 때문이다. 경쟁이나 승패를 의식하기 시작하면 타인과 세계를 '적'으로 느끼게 된다. 경쟁의 무서운 이유는 경쟁에서 계속 이긴다고 할지라도 적으로 넘쳐나는 위험한 삶 속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나를 24시간 주시하는 사람은 없다. 나만이 나를 주의 깊게 볼 뿐이다. 타인의 행복을 진심으로 축복하지 못하는 것도 인간관계를 경쟁으로 바라보고 타인의 행복을 '나의 패배'로 여기기 때문이다. 경쟁의 도식에서 해방되면 '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해방되고 타인의 행복을 진심으로 축복할 수 있으며, 타인의 행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공헌할 수 있게 된다. 내가 그 사람에게 '친구'가 되는 것이다.
◆: 권력투쟁에서 복수로
사적인 분노는 타인을 굴복시키려는 도구에 불과하다. 싸움에서 이겨서 자신의 힘을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상대에게 똑같이 도발하면 상대는 복수를 계획하고 보복에 나선다. 인간관계가 복수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면 당사자끼리의 해결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권력투쟁을 위해 싸움을 걸어왔을 때는 절대 응해서는 안 된다.
◆: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패배가 아니다
분노가 커뮤니케이션의 한 형태이듯, 함께 분노하지 않는 것도 커뮤니케이션의 형태이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참을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분노 의외의 유용한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없는 것이다. 논리적인 말을 믿으면 언어를 통해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다. 또한 아무리 자신이 옳다고 여겨도 그것을 이유로 상대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나는 옳다'는 확신은 '이 사람은 틀렸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궁극적으로는 '그러니까 나는 이겨야 한다'며 승패를 다투게 된다. 이것은 완벽한 권력투쟁이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 사과하는 것, 권력투쟁에서 물러나는 것. 이런 것들이 전부 패배는 아니며 우월성 추구와 상관없다. 경쟁이나 승패의 안경을 벗어야 비로소 자신을 바로 보게 되고, 자신을 바꿀 수 있다.
◆: '인생의 과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아들러 심리학은 인간의 행동과 심리, 양 측면에서 아주 분명한 목표를 제시한다. 행동의 목표로는 '자립할 것'과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이라는 두 가지를, 이러한 행동을 뒷받침하는 심리적 목표로는 '내게는 능력이 있다'는 의식을 갖는 것과 그로부터 '사람들은 내 친구다'라는 의식을 갖는 것이다
또한 아들러는 '인생의 과제'를 '개인이 사회적인 존재로 살고자 할 때 직면할 수밖에 없는 인간관계'라고 말했다. 여기에는 '일의 과제, '교우의 과제', '사랑의 과제'가 있다. '일의 과제'란 어떤 일이든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해낼 수 없기에 업무상 맺는 인간관계이다
◆: 붉은 실과 단단한 쇠사슬
‘교우의 과제'란 일을 벗어난 더 넓은 의미에서의 친구 관계이다. 강제성이 없기 때문에 관계를 맺는 것도, 깊어지는 것도 어렵다. 친구와 지인의 수보다 중요한 것은 관계의 거리와 깊이이다. '사랑의 과제'는 연애와 가족관계를 말한다. 아들러는 사랑을 상대가 행복하다면 그 모습을 순순히 축복해주는 것이라고 보았다. 즉,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이다. 함께 사이좋게 살고 싶다면, 서로를 대등한 인격체로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연인, 부부의 관계는 붉은 실 같아서 힘들다면 헤어질 수 있지만 부모자식 관계는 단단한 쇠사슬 같아서 어려움이 있다
◆: '인생의 거짓말'을 외면하지 말라
누군가가 싫어지는 것에는 이유가 없다. 싫어졌기 때문에 이유를 찾는 것이다. 여러 가지 구실을 만들어서 인생의 과제를 회피하려는 사태를 가리켜 '인생의 거짓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인생의 거짓말에 의지하는 것은 '악'에 물들어서가 아니라 '용기'의 문제다
◆: '소유의 심리학'에서 '사용의 심리학'으로
인간은 트라우마에 휘청거릴 만큼 나약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인생과 생활양식을 자기 손으로 스스로 고르는 힘이 있다. 공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성공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학력이 낮은 것과 성공은 어떤 인과관계도 없다. 지금 누리고 있는 놀거나 취미를 즐기고 있는 시간을 희생해서까지 변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청년: 사람이 스스로를 싫어한다면 그건 장점이 없어서지, 본인에게 이익이 있어서 스스로를 싫어할 수는 없다.
철학자: 단점만 눈에 들어오는 건 그 사람이 '나 자신을 좋아하지 말자'라는 결심을 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건 부정적인 생각을 낳음에도 그런 결심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본인의 사실을 단점이라고 규정하면 더 이상 용기를 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청년: 아무리 그래도 모든 고민을 그렇게 치부하는 건 말이 안된다. 개인이 개인으로서 몸부림치는 고민, 자기 내면을 향한 고민은 모조리 부정하는 건가?
철학자: 그렇다. 내면의 고민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자들이 끊임없이 탐구해온 주제조차도 모두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고민들이다. 주제를 조금 바꿔보자. 열등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청년: 나는 나와 비슷한 또래가 활약하는 모습을 보거나, 주근깨로 가득한 얼굴을 보면 열등감을 느낀다. 이런 건 어떻게 봐야 하나?
철학자: 나는 키가 155cm이다. 하지만 나의 키는 열등한 게 아니다. 평균보다 작다고 하더라도, 내가 내 키에 열등감을 느낀다면 그건 주관적인 감정에서 올라오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가치 판단'인 것인데, 이런 가치는 사회적인 맥락에서 성립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치의 문제도 최종적으로 인간관계로 환원된다.
청년: 인간은 왜 열등감을 느끼는 건가?
철학자: 인간은 기본적으로 무기력한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났고, 무기력한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보편적인 욕구를 갖고 있다. 아들러는 이를 '우월성 추구'라고 했는데, 아무것도 못하던 갓난아기가 의사소통을 하게 되기까지나 인류사 전체서 일어난 과학의 진보도 우월성 추구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열등감은 이와 대조적으로, 우월성을 추구하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 때 느끼는 부족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열등감은 나쁜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며, 건강하고 정상적인 노력과 성장을 하기 위한 자극이다.
청년: 그러면 열등감은 정상적인 거니까 "어차피 나 같은 건", "어차피 열심히 해봤자"하면서 포기해도 되나?
철학자: 그건 열등감이 아니라 열등 콤플렉스다. 콤플렉스 단어 자체는 복잡하게 얽혀 어그러진 심리 상태로 열등감과 큰 관련이 없다. 열등감은 노력과 성장을 자극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열등 콤플렉스는 자신의 열등감을 변명거리로 삼기 시작할 상태를 의미한다. "나는 학력이 낮아서 성공할 수 없다"나 "나는 못생겨서 결혼을 할 수가 없다"는 열등감의 범주를 벗어나 열등 콤플렉스다.
청년: 하지만 학력이 낮으면 취직자리도 줄고, 못생기면 이성의 선택도 덜 받는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 아닌가?
철학자: 그렇지 않다. 아들러는 이러한 인과관계를 '무늬만 인과법칙'이라는 용어로 정의내린다. 원래는 어떤 인과관계도 없는 것을, 마치 중대한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설명하고 납득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학력이 높은 사람이 사회적으로 성공하더라도, 그런 현실을 어떻게 직시하냐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학력이 낮아서 성공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면 그건 성공하고 싶지 않은 것으로 봐야 한다. 현재의 즐거움을 포기하면서까지 노력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다소 부자유스러움에도 현재의 상황을 유지하도록 한다.
"A라서 B를 할 수 없다"는 "A만 아니라면 B를 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A만 아니면 유능하고 가치있는 존재라는 걸 암시한다는 것. 누구나 열등감을 갖고 있지만 언제까지나 그 상태를 참고 견딜 수는 없다. 그래서 보통은 노력과 성장으로 열등감을 채우려고 하지만 그런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A만 아니라면'을 외치게 된다.
청년: 'A만 아니라면 다 할 수 있다'는 열등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허세 아닌가?
철학자: 맞는 말이다. 열등 콤플렉스는 또 다른 특수한 심리 상태인 우월 콤플렉스를 불러일으킨다. 못난 나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값싼 행동으로 보상받으려 하고, 이는 '거짓 우월성'을 불러일으킨다. 거짓 우월성의 대표적인 예시는 '권위 부여'이다. '권위 부여'는 권력자와 가까운 사이임을 어필하거나, 브랜드 제품을 과시하는 것과 같은 행동으로 '나'와 권위를 연결시켜 마치 스스로가 우월한 사람인 듯 꾸며낸다. 그러나 이는 거짓된 우월성으로, 권위의 힘을 빌려 포장하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다른 사람의 가치관에 맞춰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게 된다.
청년: 거짓 우월성의 또 다른 사례가 있을까?
철학자: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도 거짓 우월성의 발로이다. 아들러는 "만약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열등감을 느끼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자랑이라도 하지 않으면, 주위에 아무도 '이런 나'를 인정해주지 않을 거 같아 겁을 느끼는 심리상태, 이 또한 완벽한 우월 콤플렉스라고 볼 수 있다. 자랑의 예를 하나 더 들어보면, 불행 자랑이 있다. 불행 자랑이란, 성장 과정에서 자신이 겪은 불행을 마치 뽐내듯 말하거나, 타인이 변화를 권하면 "너는 내 심정이 어떤지 몰라"하면서 도움의 손길을 뿌리치는 걸 가리킨다. 불행 자랑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불행함을 내세워 오히려 남보다 위에 서려고 한다. 남의 조언을 강하게 거부하면서, 사람들은 나를 조심스럽게 대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불행함을 주장하던 사람은 오히려 남들보다 '특별한 존재'로 자리잡는다.
청년: 아들러는 '우월성 추구'는 보편적인 욕구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막상 사람들이 우월감에 대해 느끼는 것에는 경종을 울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철학자: 우월성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넘어뜨리면서까지 위로 올라가려는 걸 떠오르기 쉽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한 걸음 성장시키려는 의지를 뜻하지, 남들보다 높이 올라가려고 경쟁하는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경쟁이 아니며, 다른 사람과 억지로 비교하며 자신을 탓할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열등감 또한, 타인과 비교하지 않고 '이상적인 나'와 비교하는 게 타당하다.
청년: 열등감과 우월감에 대해서는 이정도 얘기하면 될 것 같다. 애초에 왜 열등감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는가?
철학자: '경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이다. 인간관계의 중심에 경쟁이 있으면 인간은 영영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경쟁은 승자와 패자가 있고, 이런 것을 의식하면 필연적으로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면서 세계를 적으로 취급하게 된다. 세계를 적으로 넘치는 위험한 장소로 본다면, 인간은 행복해질 수가 없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타인을 그렇게까지 신경쓰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경쟁에서 벗어난다면, 사람들을 친구로 여길 수 있게 되고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도 눈에 띄게 줄어들 것이다.
청년: 1부에서 얘기한 '인간은 분노라는 감정을 지어낸다.'는 말이 잘 납득가지 않는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선생님을 별 이유도 없이 매도하면 화가 나지 않는가?
철학자: 화나지 않고 그 사람의 숨겨진 목적을 생각해봤을 것 같다. 상대의 말 때문에 화가 난다면, 그 사람은 '권력투쟁'을 위해 싸움을 거는 것이라고 생각해라. 즉, 상대방은 나에게 비난하는 말을 내뱉음으로써, 평소 못마땅한 나를 굴복하려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화를 같이 내면 권력투쟁에 휘말리는 것이고, 설령 이긴다고 해봤자 상대방은 '복수'를 계획하기 때문에 여기에 말려서는 안 된다.
청년: 그러면 누가 인신공격을 하면 그저 참아야 하는가?
철학자: 참는다는 발상 자체가 권력투쟁에 사로잡힌 것이다. 이럴 때는 서둘러서 싸움에 물러나야 한다. 또한, '참는다'는 건 분노를 제어하는 걸 뜻하므로, 애초에 분노라는 도구에 의존하지 않고 사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말을 통해 해결하려고 하고, 상대방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항상 해야 한다.
아들러의 '행동의 목표'와 '심리의 목표'
청년: 앞의 말은 그럭저럭 알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들러가 왜 모든 문제는 인간관계에서 나온다고 할 만큼 인간관계를 중요시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서 아들러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철학자: 아들러 심리학은 인간의 '행동'과 '심리', 양 측면에서 분명한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먼저 행동의 목표로는 '자립할 것'과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을 제시하였다. 또한 심리의 목표로는 '내게는 능력이 있다'는 의식을 갖는 것과 '사람들은 내 친구다'라는 의식을 갖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는 인생의 과제를 직시함으로써 달성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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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밤 - 타인의 과제를 버려라
◆: 인정욕구를 부정하라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타인에게 인정받기 원하는 마음을 부정한다. 타인에게 인정 받을 필요가 없고, 인정받기를 바라서도 안 된다
◆: '그 사람'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살지 말라
인정욕구는 대개 상벌교육의 영향이다. 칭찬 받을 목적으로 특정 행동을 하거나, 벌주는 사람이 없으면 부적절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유대교 교리에는 "내가 나를.위해 내 인생을 살지 않으면, 대체 누가 나를 위해 살아 준단 말인가."라는 말이 있다. 누구를 위해 사느냐고 하면 당연히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한다
◆: '과제를 분리'하라
우리는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할 필요가 있다. 모든 인간관계의 트러블은 대부분 타인의 과제에 함부로 침범하는 것에 의해 발생한다. 과제를 분리할 수 있게 되면 인간관계가 급격히 달라진다. 누구의 과제인지 지분하는 방법은 '그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 돕기는 하지만 끝까지 개입해서는 안 된다. 결국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자신 밖에 없다
◆: 타인의 과제를 버려라
타인과 과제를 분리하지 않은 채 자신의 희망만 밀어붙이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할 '개입'이다.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거나 타인의 과제를 떠안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무겁게 짓누른다. 만약 인생에 고민과 괴로움이 있다면 그 고민은 인간관계에 있으니 먼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는 내 과제가 아니다"라고 경계선을 정해라. 그리고 타인의 과제는 버려라. 그것이 인생의 짐을 덜고 인생을 단순하게 만드는 첫걸음이다
◆: 인간관계의 고민을 단숨에 해결하는 방법
자신의 삶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믿는 최선의 길을 선택하는 것' 그 뿐이다. 그 선택에 타인이 어떤 평가를 내리느냐 하는 것은 타인의 과제이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 절대 누구도 내 과제에 개입시키지 말고, 나도 타인의 개입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구체적이고도 대인관계의 고민을 단숨에 해결할 수 있는, 아들러 심리학만의 획기적인 점이다
◆: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으라
인간관계에 복잡하게 얽힌 매듭(:고르디우스의 매듭)은 기존의 방법(매듭을 푸는 것)으로 없고 완전히 새로운 수단(단검)으로 끊어야 한다. 아들러 심리학에는 상식에 대한 안티테제(반정립) 라는 측면이 있다. 원인론과 트라우마를 부정하고 목적론을 추구하는 것, 인간의 고민은 전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는 것, 인정받기를 바라지 않는 것, 나아가 과제의 분리까지 모두 상식에 대한 안티테제이다.
◆: 인정욕구는 부자유를 강요한다
내 갈길을 스스로 결정하려면 당연히 이리저리 헤매게 된다. 다른 사람의 소망이나 안색을 살피며 사는 것도 인생의 이정표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은 너무 부자연스러우며, 누구에게도 미움을 받지 않으려고 그러는 것이다.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려고 살면, 그리고 내 인생을 타인에게 맡기면, 자신에게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계속 거짓말을 하게되는 삶을 살게 된다
◆: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타인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은 극히 자연스러운 욕망이자 충동이다. 칸트는 이를 경향성'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경향성에 이끌려 사는 것은 비탈길을 굴러 내려가는 돌맹이와 같은 삶이지, 자유는 아니다. 진정한 자유란 굴러 내려가는 자신을 아래에서 밀어 올려주는 태도이다.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것은 내가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증거이자 스스로의 방침에 따라 살고 있다는 증표이다. 남이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든 마음에 두지 않고, 남이 나를 싫어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인정받지 못한다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 한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다. 행복해지려면 '미움받을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런 용기가 생겼을 때, 인간관계는 한 순간에 달라진다.
◆: 인간관계의 카드는 '내'가 쥐고 있다
인간관계라고 하면 보통 :두 사람의 관계' 혹은 '다수와의 관계'를 떠올리지만 자기 자신이 먼저다. 인정받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으면 인간관계의 카드는 언제나 남이 가질 수 밖에 없다.
청년: 자유로워지기 위해 타인의 인정에 기대지 않고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철학자: 부모에게 미움을 받아도 괜찮다는 것도, 독선적으로 행동하라는 것도 아닐세. 그저 과제를 분리하라는 거지. 자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자네의 과제가 아니야. 역으로 "나를 좋아해야 한다 " , "이렇게 애를 썼는데 좋아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상대의 과제에 개입하는 보상적 발상이라네. 미움을 살 가능성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비탈길을 굴러가듯이 살지 않고 눈앞의 언덕을 올라간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일세. 만약 내 앞에 '모두에게 사랑받는 인생'과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인생'이 있고, 이중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한다고 치세. 나라면 주저하지 않고 후자를 택할 걸세.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보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으니까. 즉 자유롭게 살고 싶은 거지. ’나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바라는 것은 내 과제야. '나를 싫어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타인의 과제고.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나는 거기에 개입할 수 없네. 물론 전에도 말했듯이 '말을 물가로 데리고 가는'노력은 할 걸세. 하지만 거기서 물을 마시느냐 마시지 않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과제지. 말을 물가에 데려칼 수는 있지만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
자네는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네. 나도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타인의 기대 같은 것은 만족시킬 필요가 없다는 말일세
"네 얼굴을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은 너 뿐이다." 그 말에는 과제 분리의 핵심이 담겨 있어 다른 사람이 자네의 얼굴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그건 그 사람의 과제야 자네가 이러쿵저러쿵 따질 문제가 아닐세 내가 하는 일에 대해 누군가가 부당하게 화를 내도 그것은 나의 과제가 아니야 그가 해결해야한 과제지 그것에 대해 내가 위축되고 힘들어할 필요가 없다.
누구에게도 미움을 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하나밖에 없네. 언제나 다른 사람의 안색을 살피면서 모든 사람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 만약 주변에 열 명의 사람이 있다면 열 명 전원에게 충성을 다하는 거지. 그러면 당장은 누구에게라도 미움받지는 않을 걸세
청년: 그럼 자기 좋을 대로 살면 된다는 말씀입니까?
철학자: 자기 인생을 원하는 대로 살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남이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든 마음에 두지 않고, 남이 나를 싫어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인정받지 못한다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 한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어. 자유롭게 살 수 없지 인간 관계의 카드는 언제나 '내'가 쥐고 있다.
네 번째 밤 - 세계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가
◆: 개인심리학과 전체론
인간은 몸과 마음, 이성과 감정, 의식과 무의식 등으로 따로 분할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전체'로 생각해야 한다.(전체론)
◆: 인간관계의 목표는 '공동체 감각'을 향한 것
인간관계의 목표는 '공동체 감각(social interest)'에 있다. 공동체 감각이란 타인을 친구로 여기고, 거기서 '내가 있을 곳은 여기'라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공동체'에는 가정, 학교, 직장, 지역사회, 국가, 인류, 과거와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 축, 동식물과 무생물까지 포함한다. 즉, 우주 전체를 포함한 만물이다. 불행의 근원은 인간관계에 있고, 행복의 원천 또한 인간관계에 있다. 사회의 최소 단위인 '나와 너'를 기준점으로 자기에 대한 집착(self interest)을 타인에 대한 관심(social interest)로 바꾸는 것에서 시작한다
◆: 왜 '나' 이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가
'과제의 분리'를 못하고 인정욕구에 사로잡혀 남들의 시선을 신경쓰는 사람은 자기에 대한 집착이 있는, 자기중심적인, '나'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타인을 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밖에 보지 않는다
◆: 나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나'는 인생의 주인공이면서도 언제까지나 공동체의 일원이자 전체의 일부이다. 내가 '세계의 주인공'이라고 믿으면 "다른 사람이 내게 무엇을 해줄까?"에 대해서만 생각하지만 그 기대는 번번히 깨진다. 타인은 나의 기대를 채워주고 위해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은 머지않아 '친구'를 잃게 된다. 우리는 모두 '여기에 있어도 좋다'는 소속감을 갖기를 원하지만 소속감은 가만히 있으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적극적으로 공동체에 공헌(commit)함으로써 스스로 획득해야 한다. 그 방법은 '인생의 과제'에 직면하는 것이다. 인간관계의 과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이 사람은 내게 무엇을 해줄까?'가 아니라 '내가 이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 더 큰 공동체의 목소리를 들으라
눈앞의 공동체에만 매달리지 말고 더 큰 공동체에서도 어떠한 공헌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해라. 더 큰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 작은 공동체에서 느끼는 고통이 '찾잔 속의 태풍'임을 알게된다. 찻잔 밖으로 나오면 거칠게 몰아치던 태풍도 실바람으로 변한다. 인간관계에서 곤경에 처하고,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더 큰 공동체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관계가 깨질까 봐 전전긍긍하며 사는 것은 타인을 위해 사는 부자유스러운 삶이다. 보다 다른 '나와 너', 보다 다양한 사람들', 보다 큰 공동체는 반드시 존재한다.
◆: 칭찬도 하지 말고, 야단도 치지 말라
칭찬한다'는 행위에는 '능력 있는 사람이 능력 없는 사람에게 내리는 평가'라는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즉 배후에 상하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칭찬에는 상대를 조종하기 위한 목적이 있으며 감사와 존경의 마음은 없다. 인간관계는 모두 수평관계여야 한다. 우리는 모두 다르지만 대등한 관계이다
◆: '용기 부여'를 하는 과정
수평관계를 맺으면 '개입'도 사라진다. 인간관계를 수직적으로 받아들이면, 상대를 자신보다 아래로 보고 개입을 한다.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는 '개입'이 아닌 '지원'이 필요하다. 지원이란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고 스스로 과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곁에서 힘이 되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지원을 '용기 부여'라고 하는데 서로가 다름을 받아들이면서 대등한 수평관계를 맺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가능하다.
◆: 스스로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려면
중요한 것은 타인을 '평가'하지 않는 것이다. 수평관계에서는 감사, 존경, 기쁨의 인사같은 순수한 말이 자주 나온다. 감사의 말을 들으면 스스로 타인에게 공헌했음을 깨닫게 된다. 인간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낄 때에만 용기를 얻는다. 공동체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끼는 것. 타인으로부터 '좋다'는 평가를 받을 필요 없이 자신의 주관에 따라 '나는 다른 사람에게 공헌하고 있다'고 느끼면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생각하게 되다
◆: 여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가치가 있다
타인을 '행위'의 차원이 아닌 '존재'의 차원에서 살펴봐라. '무엇을 했는가'로 판단하지 말고 거기에 존재하는 그 자체를 기뻐하고 감사해라. 누군가가 협력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나와 관계가 없다. 나부터 시작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협력하든 안 하든
◆: 인간은 '나'를 구분할 수 없다
본인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이 든다면 다른 사람과, 한 명이라도 좋으니 수평관계를 맺는 것부터 시작해라. 한 사람이라도 수직관계를 맺고 있다면, 나는 나도 모르게 모든 인간관계를 :수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허물없이 행동하라는 것이 아니라 의식상에서 대등하고 주장할 것은 당당하게 주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섯 번째 밤 -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간다
◆: 과도한 자의식이 브레이크를 건다
우리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그저 "용기" 가 부족한 것이다.
◆: 자기긍정이 아닌 자기수용을 하라
공동체 감각의 첫 번째 키워드는 '자기수용'이다. '자기수용'이란 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하지 못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할 수 있을 때까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자기긍정'과는 다르다.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주어진 것'은 바꼴 수 없지만 '주어진 것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내 힘으로 바꿀 수가 있다. 따라서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닌, '바꿀 수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하고 바꾸는 용기를 내야 한다. 이것이 자기수용이다.
"신이여. 바라옵건대 제게 바꾸지 못하는 일을 받아들이는 차분함과 바꿀 수 있는 일을 바꾸는 용기와 그 차이를 늘 구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니버의 기도 중에서
◆: 신용과 신뢰는 어떻게 다른가
공동체 감각을 얻기 위한 두 번째. 키워드는 '타자 신뢰'이다. 신뢰란 믿을 때 조건을 일절 달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나를 배신할 수 있다. 그러나 배신할지 안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타인의 과제이다. 나는 그저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만 생각하면 된다. 신뢰하는 것이 두려워 상대에게 회의감을 가지면 상대방은 그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기 때문에 관계는 깊어지지 않는다. 얕은 관계를 맺으면 고통은 작겠지만 그런 관계에서 맛보는 행복 또한 작을 것이다. '타자신뢰'를 통해 더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갈 용기를 가질 때 인간관계의 즐거움이 늘어나고, 인생의 기쁨 또한 늘어난다. 믿을 것인가, 의심할 것인가. 당신이 선택할 수 있다.
◆: 일의 본질은 타인에게 공헌하는 것
공동체 감각의 마지막 키워드는 '타자 공헌'이다. 타자 공헌이란 '나'를 버리고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가치를 실감하기 위한 행위이다. 일을 하는 것도 타자 공헌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타인에게 공헌하고, 공동체에 헌신하며 '여기에 있어도 좋다'는 걸 확인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귀찮은 일이 주어졌을 때, '왜 나만 일해야 하는 거지?'라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라. 설령 '고맙다'는 말을 듣지 못하더라도. 짜증을 내면서 일을 해봤자 내 마음도 불편하고 타인도 선뜻 다가오지 못한다. 반대로 즐겁게 일하고 있으면 사람들이 돕기 쉬운 분위기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는 내가 타인을 '친구'로 여길 때 가능한 상황이다.
◆: 젊은 사람은 어른보다 앞서나간다
남이 내게 무엇을 해주느냐가 아니라, 내가 남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실천해보라.
◆: 일의 전부라는 인생의 거짓말
불쾌한 경험을 주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공격하는 '그 사람'이 문제이지 결코 '모두'가 나쁜 것이 아니다. 인생의 조화가 결여된 사람은 나를 싫어하는 한 명만 보고 세계를 판단하는 일반화에 빠진다. "열 명의 사람이 있다면 그 중 한 사람은 반드시 당신을 비판한다. 당신을 싫어하고, 당신 역서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열 명 중 두 사람은 당신과 서로 모든 것을 받아주는 더 없는 벗이 된다. 남은 일곱 명은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이다. 유대교 교리 중에서 일 중독자 역시 인생의 조화가 결여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일을 구실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어느 한 가지만 돌출되는 삶의 방식을 아들러는 인정하지 않는다. '일'이란 회사에서의 일함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집안일, 양육, 친구와의 교류, 취미 등 모든 것이다.
◆: 인간은 지금, 이 순간부터 행복해질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 최대의 불행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공동체에 유익하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통해서만 자신이 가치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타자 공헌은 보이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타자 공헌을 판단하는 사람은 타인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느끼는 '공헌감'이다. 그리고 공헌감이 곧 행복이다.
◆: ‘특별한 존재’가 되고픈 사람 앞에 놓인 두 갈래 길
우리 인간은 ‘우월성 추구’ 즉 ‘향상되길 바라는 마음’, ‘이상적인 상태를 추구하는 마음’이라는 보편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네. 여기서 특별히 잘하는 것도, 특별히 못되게 구는 것도 목적은 같네. 남들로부터 주목받고, ‘평범한 상태에서 탈피하여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목적이네. 문제행동을 하는 아이는 일정한 건전한 노력은 외면한 채, 주목만 받으려고 하지.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그를 일컬어, ‘안이한 우월성 추구’라고 하네.
◆: 평범해질 용기
사람들이 특별해지려고 하는 것은 평범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평범한 것은 무능한 것이 아니다.
◆: 인생이란 찰나의 연속이다
우리 인생은 선이 아니라 점이 연속되어있는 모습이다. 인생은 '지금'이라는 찰나의 연속이다. 계획적인 인생은 불가능하다. 인생이 정상에 도달하기 위한 등산이라면 사람은 인생의 대부분을 길 위에서 보내게 된다. 즉, 정상에 오른 순간부터 진짜 인생이고 그곳에 이르기까지의 노정은 '가짜인 나'가 지나온 '가짜 인생'이 되는 것이다.
◆: 춤을 추듯 살라
인생이란 지금 이 찰나를 뱅글뱅글 춤추듯이 사는, 찰나의 연속이다. 그러다 문득 주위를 돌아봤을 때 "여기까지 왔다니!"하고 깨닫게 된다. 각자 다른 장소에서 다른 춤을 추지만 그 누구도 길 위에서 삶을 끝내지 않는다. 춤을 추면서 어디론가로 가야겠다고 생각하지않고 춤추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지금, 여기'에 충실한 것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키네시스(kinesis)적 인생'에 반대되는 '에네르게이아(energeia)적 인생'이다. 키네시스에는 시점과 종점이 있고 가능한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달성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서 목적지까지 도달하지 못한 여정은 불완전한 것이 된다. 그러나 에네르게이아는 지금 하고 있는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상태'가 된 운동이다. '과정 자체를 결과로 보는 운동'인 것이다. 여행도 춤을 추는 것과 같다. 여행을 관광명소를 최단거리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나온 순간부터 목적지를 향해 가는 과정을 포함한 모든 순간을 여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사정이 생겨 중요한 곳에 가지 못하더라도 여행을 하지 앞은 것이 아니지 않은가.
◆: 지금, 여기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라
인생 전체에 흐릿한 빛을 비추면 과거와 미래가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겠지만 '지금 여기'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과거도 미래도 보이지 않게 된다. 우리는 좋 더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야 한다. 과거가 보이는 것 같고, 미래가 예측되는 듯한 기분이 든다면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지 않고 희미한 빛 속에 살고 있다는 증거이다. 인생은 찰나의 연속이며,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든지 간에 당신의 '지금, 여기'와는 어떤 상관도 없고, 미래가 어떻게 되든 간에 '지금, 여기'에서 생각할 문제는 아니다.
◆: 인생 최대의 거짓말
솔직히 이걸 하고 싶은데 아직 때가 아니니 그때가 되면 하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생을 뒤로 미루는 삶의 방식이다. 인생을 뒤로 미루는 한 우리는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단색으로 칠해진 따분한 나날만 보내게 된다. 인생은 언제나 단순하지 심각한 게 아니다. 각각의 찰나를 진지하게 살면 심각해질 필요가 없다.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았다면 설사 지금 당장 생을 마친다고 해도 불행하다고 할 것까지는 없을 것이다. 스무 살에 마치든, 아흔살에 마치든 모두 완결되고 행복된 삶일테니까. 인생 최대의 거짓말은 '지금, 여기'를 살지 않는 것이다. 인생에 더없이 소중한 찰나에 엄청난 거짓말을 하지 말자. 당신에게는 '지금, 여기'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출 힘의 있다.
◆: 무의미한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라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전쟁, 천재지변과 같은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계속 일어난다. 전쟁에 휘말려 목숨을 잃은 아이들을 앞에 두고 '인생의 의미'를 말할 수는 없다. 인생에 일반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의미란 없다. 하지만 부조리한 비극 앞에서 우리는 "이제부터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인생의 의미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나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 자유로운 인생을 살기 위한 지침으로 '타자공헌'을 길잡이 별로 삼으면 된다. '타인에게 공헌한다'는 길잡이 별만 놓치지 않는다면 헤맬 일도 없고 뭘 해도 상관이 없다. 내 하늘 위에 타자공헌의라는 별을 결면 늘 행복의 함께하고 친구도 함께한다. 그리고 찰나인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춤추고, 진지하게 살아라. 과거도, 미래도 보지 말고 완결된 찰나를 춤추듯 사는 것이다. 누구와 경쟁할 필요도 없고 목적지도 필요 없다. 춤을 추다 보면 어딘가에 도착한다. 내가 바뀌면 세계가 바뀐다. 세계란 다른 누군가가 바꿔주는 것의 아니라, 오로지 나의 힘으로만 바뀔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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