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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자료

26. 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주)창비

 

26. 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주)창비

 

회사 서적 진열장에서 우연히 발견하게된 책"엄마를 부탁해"를 보고 얼른 뽑아 읽어보게 되었다.

내가 알기로는 몇개월째 계속 베스트셀러로 가장 많은 독자들이 읽은 책이라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편소설은 오랜만에 읽는거라 그런지 처음 몇장을 읽기 시작 할때부터 재미를 붙이더니 매일 뜸날때마다 특히 지하철을 따고 출퇴근시 열심히 앍다보니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책은 6.25전쟁을 격은 불행한 우리나라의 부모세대에 대한 자식사랑을 매우 사실적으로 잘 표현된 소설이라 생각된다.

나 역시 이와 같은 세대의 부모님 사랑을 듬뿍 받고 잘아났기에 더욱 동감이 가는 대목이 대부분이다.

책을 읽다 나도 얼른 어머님께 안부전화를 드려보고 어머님의 바램은 무엇일까 하고 진정한 효도의 마음을 가지게 하였다.

나역시 엄마를 잃어버린것이 아닌지 아니 이미 잊어버린것이 아닌지 깊이 반성하게 하는 고마운 책이다.

 

작가는 소설속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과 후회 그리고 자책등으로 인해 감히 "나"의 표현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너"의 표현으로 바꾸었다.

이는 곧 "너"는 독자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며 독지의 자신 모두 엄마에 대한 사랑을 이해하고 후회없는 효도를 하지 않으리라는 의도 아래 "나"를"너"로 표현하여 함께 미안함과 잘못을 나누어 가지자는 의미인 것이라 나름대로 생각된다.

 

-줄거리-

6.25를 겪은 노부부가 시골에서 어렵게 다섯 남매를 성장시켜 모두 서울로 떠나보내 후  
생일상을 받으러 둘째 아들집에 찾으러갔다가 마중온다는 자식의 권유를 마다하고 노부부 스스로

혼잡한 오전시간 서울지하철역에서 엄마가 아빠의 걸음을 따라가지 못해 함께 아빠 혼자만 지하철을 타고 문이 닫히는 바람에
엄마는 지하철을 노쳐서 엄마를 잃어버렸다.

가족들은 잃어버린 엄마를 찾으려고 전단지를 만들어 돌리면서 사방으로 찾아다니지만 잃어버린 엄마는 찾지못한다

자식들은 엄마를 잃어버리기전에는 엄마를 잊고살다가 엄마를 잃어버린후에야

이미 일주일전에 잃은 것이 아니라 벌써 수년 전 부터 잊고 있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닭는다.

 

그 잘못에대하여 아빠랑, 동생이랑, 두오빠랑, 너(나)랑 뉘우치지만...

엄마!
평생을 가족에 대한 헌신과 배려와 고단한 노동으로 채워온 엄마의 고마움을 잊고살다가
엄마를 잃어버린후에야 엄마의 고마움을 뼈아프게 느낀들...

 

언젠가 엄마가 말한 세상에서 제일 작은 나라의 장미묵주를 사들고  바티칸제국 성베드로성당에 들어가 죽은아들을 품에안은
성모의 "피에트상"을 보고 나오는 성당 입구에서 그제야 여인상 앞에서 차마하지 못한  처절한 고해성사 한마디

엄마를,엄마를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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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피에타, 그 영원한 귀한 / 정홍수

 

신경숙의 장편소설<엄마를 부탁해>는 글을 향해 서서히 몸을 기울일 시간을 주지 않는다.

소설 속 ‘너’의 가슴 치는 후회와 자책은 곧장 소설을 읽는 ‘나’의 그것이 된다.

그 누구도 숨을 곳이 없다.

지하철 서울역 구내에서 동행하던 남편을 놓친 뒤, 길을 잃고 사라져버린 칠순의 늙은 엄마.

텅 빈 고향집으로 내려가 아내를 기다리고 있는 무력한 늙은 아비에게 전단지를 들고

서울 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큰딸이 첫새벽에 전화를 건다.

그리고 마침내 터져나오는 울음. “어-어어어.” 소설은 이어서 적어놓았다.

“딸의 울음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당신이 붙잡고 있는 수화기 줄을 타고

딸의 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당신의 얼굴도 눈물범벅이 되었다.”

수화기 줄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그리고 우리에게도 온다.

그런 게 있다면, 그 눈물은 인간이라는 생명의 골짜기를 하염없이 적셔온 누대의 그것일 터이다.

그러니까 사정은 생일상을 받으러 상경한 노모의 실종이라는 충격적이고 참담한 사건과

무관한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조금씩 드러나지만, 가족들은 엄마를 잃어버리기 이전에 이미

엄마를 거의 ‘잊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엄마의 실종을 계기로 ‘잃다’와 ‘잊다’가 같은 말이었음을

뼈아프게 깨닫는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라는 문장은 소설의 처음에 놓여 있지만 실상 그 문장은

뜯어고쳐지기 위해, 아니 가혹하게 고발당하고 심문받기 위해 거기 그렇게 놓여 있어야

했던 것이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혹은 ‘엄마를 잊은 지 오래였다’가 맞는 말이어야 했다.

<엄마를 부탁해>는 그 잘못에 대한 처절한 고해성사다.

여기서 ‘처절한’은 전혀 흔한 수사가 아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신경숙이 들려주는 한 가족의 고해성사는 첫 문장의 잘못을

‘너는’그는, 당신은, 엄마를 한 번도 그이가 지닌 인간의 존엄 위에서 대하고

생각한 적이 없다‘는 지경까지 몰아간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평생을 가족에 대한 헌신과 배려의 고단하고 고단한 노동으로 채워온 엄마를.

그러나 정말 그렇지 않은가.

나도, 당신도. 우리는 한없이 자책하며 우리의 죄를 고해할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소설 속 ‘너’가 마침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과 만나고 그 앞에

무릎 꿇는 게 어찌 우연일 수 있으랴.

이것은 죄와 구원을 둘러싼 아득한 심연, 그 심연을 사이에 둔 인류의 오랜 탄식의 이야기다.

그러면서 이것은 <감자 먹는 사람들>과 <외딴방>의 작가 신경숙만이 들려줄 수 있는

지금 이곳의 간절하고 간곡한 이야기다

소설은 모두 네 개의 장과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다.

앞의 세 장은 큰딸, 큰아들, 그리고 아버지가 고해의 주체다.

그런데 그 고해는 ‘나는’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그들은 ‘너’‘그’그리고 ‘당신’으로

호명되며 엄마의 실종, 그 부재의 자리에서 간단없이 솟구치는 엄마의 기억과 고통스럽게

대면한다. ‘너’가 호명되는 1장이 더 그러한데, 여기에는 심문의 분위기마저 있다.

그렇다면 누가 그들을 그렇게 호명하며 고해의 장으로 불러낸 것일까.

원리적으로 보면 엄마여야 한다.

실제, 마지막 4장은 사라진 엄마가 일인칭 화자로 등장하여 둘째딸의 집,

평생 숨겨온 마음의 의지 처인 곰소의 그 남자 집,

남편과 아이들 고모가 있는 고향집,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태어나 자랐던 ‘엄마’의 집을 차례로 돌며 세상과의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엄마는, 비록 중음 신처럼 육신을 허공에 띄운 채로이긴 해도,

평생 처음 온전한 한 개인의 자리로 다가가서 ‘나는’을 발화하고 가족과 숨겨둔 마음의

사랑에게 말을 건넨다.

그녀는 이제, 처음부터 엄마로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가족노동의 무한 대리인도 아니며 가족을 향한 마르지 않는 사랑의 화수분도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 자신의 고독과 수고를 몰라준 가족들을 향한 문책은 없다.

“나는 몇 해 전에 세워 놓은 선산의 가묘로는 안 갈라요.(....)

오십년도 넘게 이 집서 살았응게 인자는 날 쫌 놔주시오.”

한 가족의 엄마로만 살아온 세월에 대한 착잡한 회한을 토로하는 대목에서

그 문책의 기미를 우회적으로 느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가 다다.

그러니까 엄마에겐 가족들을 불러내 그 이들의 무심함을 질책할 마음이 처음부터 없다.

오히려 장남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2장의 제목이 ‘미안하다. 에 자각적이었다.

그러므로 엄마의 음성이 그 문책의 시선으로 소설의 표면에 노출되지 않은 것은

단지형식적인 소설적 장치의 문제일 수 없다.

그 호명과 문책의 시선은 엄마의 몫이되, 엄마가 그 몫을 거절함으로써 텅 비어버린

자리였던 것이다. 그 호명이 생성되는 빈자리를 두고 전지적 작가시점이라거나

신의 시선이라 쉽게 말하기 힘든 것도 그 때문이다.

작가는 이 작품의 연재를 시작하면서, 6년 전부터 묵혀왔지만 좀처럼 글쓰기의 진전을

보지 못하던 이번 소설이 실마리를 찾게 된 과정을 밝힌 바 있다.

“어는 날‘어머니’를 ‘엄마’로 고쳐보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어머니를 엄마로 고치고 나니 바로 첫 문장이 이루어졌다”(<창작과비평> 2007년 겨울호, 348면)고,

신경숙 소설이 늘 그 전체에서 뿜어내는 친밀성의 자장에 감싸여본 독자라면

깊이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더해, <엄마를 부탁해>는 그 두 번째 문장을 “오빠 집에 모여 있던 너의 가족들은”으로

시작하면서 지금과 같은 소설적 견고성을 획득했다고 볼 수는 없을까.

그러니까 작가의 분신이기도 한 큰딸 ‘나’는 ‘너’여야 했던 것이다.

감상성과 주관성을 견제하는 소설 기술적 장치 이상으로 이 ‘너’의 자리는 중요하다.

‘너’를 부르는 자리가 비어 있고, 그 비어 있음이 소설의 윤리를 생성시키는 힘이기에

그러하다. 다시 말해, ‘너’를 부르는 자리는 엄마의 몫이기도 하고 신의 시선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나’가 가닿으려는 불가능한 고해의 기원이 아니겠는가.

사정이 이렇다면, 그 비어 있는 자리는 하나의 시선으로 고정되기를 거부하며 차라리

들끓고 있다고 해도 좋겠다.

실제 우리는 소설을 읽어가며 그 세 시선의 단속(斷續)이 만들어내는 뜨거운 스파크를

‘너’의 자리에서 아프게 겪게 된다.

큰아들이 ‘그’가 되고 아버지가 ‘당신’이 되는 호명의 질서도 여기에서 비롯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와 ‘당신’이 호명된 2장과 3장이 엄마의 이야기를 더 절실하고

더 풍성하게 받아내는 거처럼 보인다는 점일 텐데, 여기서 장남과 남편의 자리가

이야기의 구체성에 기여하는 측면을 지적하기는 쉽다.

그러나 작가의 분신이자 ‘내포작가’이기도 한 ‘너’의 자리가 ‘그’와 ‘당신’속에

매개되고 간접화되면서 소설의 숨은 층위로 버티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되리라.

우리가 결국 이 소설에서 읽고 견뎌내야 하는 것은 ‘너’다.

엄마의 실종으로 ‘너’의 가족들이 겪는 일차적 시련은 잊고 있던 엄마에 대한 기억의

분출이다. 엄마 자신 떠도는 영혼으로 찾아온 고향집에서 “아, 봄날 새싹들처럼 (.....)

솟아나는 이 기억들을 어디서 멈춰야 할지를 모르겄네”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지만,

여기서 아련한 행복의 표현 ‘봄날 새싹들처럼’을 지운다면 그것은 그대로 제어할 수 없는

기억의 습격 앞에서 ‘너’의 가족들이 토해내는 고통스런 탄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니까 엄마에게 솟아나는 기억들은 시동생 ‘균’의 죽음이나 평생 숨겨야 했던

남자의 존재처럼 고통과 회한의 순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는 온갖 생명을

기르고 받아낸 고향집 마당의 그 충일한 햇살 아래 있는 것이며, 그러한 한 지워지고 망각된

존재성을 회복하는 쪽으로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너’와 ‘그’그리고 ‘당신’에게는 어떠한가. 엄마가 실종된 뒤,

시도 때도 없이 솟구치는 기억들은 상실의 환기며, 자책과 후회로 점철되는 통절한 시간이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다는 의미에서 진정 가혹한 시련이며, 엄마의 귀환으로만 중단될 수 있는

지극히 물리적인 곤경이다.

그동안 신경숙 소설에서 고향집을 둘러싼 모성의 세계는, 그 훼손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현대인의 실존적 정황에 대한 마땅한 탐색을 수반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가족적 인륜성의

온기로 충만한 기억의 행복한 처소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엄마를 부탁해>는 엄마의 실종을 가운데 놓고 그 기억의 행복이 엄마라는 온전한

한 개인의 ‘존재적 실종’을 조장하고 은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근본에서 되묻는 자리로 간다. 이것은 고통스런 질문의 자리다.

‘너’의 가족들을 수시로 급습하는 기억들은 엄마의 실존에 대한 자의적인 삭제와 이기적인

전유의 구체적인 증거로 제출되면서 인간 윤리와 허술한 바탕, 그 자기기만을 고발한다.

그러나 <엄마를 부탁해>는 자칫 엄숙하고 우울한 잿빛 단색으로 뒤덮이기 쉬웠을

이 기억의 법정으로부터 착잡하면 착잡한 대로, 나날의 인간사에 의연한 삶의 리듬과

결을 현전시키는 소설적 인내와 경이를 보여준다.

작품을 읽는 처음부터 우리는 달리 상상하기 힘든 생생한 사실감과 핍진성에 거듭

빠져들게 되거니와, 하염없이 열어둔 듯한 마음의 자리에서 세계의 구체와 정화(精華)를

포착하는 신경숙 소설언어의 연금술이 정말 놀랍다.

그리고 이것은 특정한 문장, 단락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하나의 단어와 문장은 오히려 무명옷처럼 소박하다 해도 좋다.

알려진 대로, 신경숙 소설은 단어와 문장의 축조가 아니라 흐름이다.

사실감과 핍진성은 일물일어(一物一語)의

숨 가쁜 대응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에서 온다.

그리고 그 흐름은 머뭇거리고 주저하는 가운데 조금씩 소설적 진실을 이룬다.

우리는 하나의 유동하는 덩어리로, 흐름의 전체에서 그것을 느낄 수밖에 없다.

<엄마를 부탁해>에서 그 흐름은 더 없이 간곡하고 순정한 평명(平明)의 질서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그 흐름은 <엄마를 부탁해>의 텍스트 안에 국한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신경숙 문학의 오랜 독자라면 누구라도 금방 느꼈겠지만, 등단작인 <겨울우화>부터

저 <풍금이 있던 자리>의 세계를 거쳐<외딴방> <감자 먹는 사람들> <모여 있는 불빛>

<새야 새야> <종소리> <바이올렛> <리진>으로 이어져온 신경숙 소설의 거의 모든 텍스트가

이번 장편 <엄마를 부탁해>에 흐르고 있다.

가령, 신경숙 글쓰기의 기원적 풍경으로 자주 이야기되는 고향집 마당의 헛간.

숨어서 오빠가 빌려온 <인어공주>를 읽던 곳.

그 소녀는 헛간 두엄을 헤집던 쇠스랑으로 자신의 발등을 찍지 않았나.

지금 그곳 헛간 평상에 소녀의 늙은 엄마가 고단했던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고통스런 표정으로 누워 있다.

불쑥 고향집에 들른 성장한 소녀가 텅 빈 집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다.

소녀는 쇠스랑을 마당 한쪽의 우물에 빠뜨리고 서울로 와 ‘외딴방’의 시간을 살았고,

이제는 소설가라는 ‘글씨 쓰는 사람’이 되어 P시의 점자도서관에서 점자로 된 자신의

소설책을 기증받고 막 엄마가 있는 J시의 고향집으로 온 참이었다.

<엄마를 부탁해>는 이렇게 작가가 자신의 이전 텍스트를, 그러니까 자신의 삶을

필사(筆寫)하며 다시 한 줄 한 줄 써내려간 소설이다.

어떤 작가를 두고 평생 한 작품만을 쓰고 또 고쳐 쓴다고 말하는 것이 더 없는 경의의

표현이 될 수 있다면, 이 경우가 그렇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엄마를 부탁해>는 신경숙 문학의 오랜 흐름을 한 곳으로 모아낸

빼어난 소설적 결정이라면서, 언젠가는 다시 고쳐 씌어질 신경숙 소설의 운명적 표정을

가장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 작품은 아닐 것인가.

                                                               -정홍수-